신이시여, 색을 거둬가오
W.비앙카


죽었구나, 그렇구나. 분홍 머리 소년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가볍게 숨을 토했다. 마츠카와는 약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죽음에 이렇게 초연한 젊은이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소년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꽤나 웃음기를 띈 얼굴에 마츠카와는 납득의 허기를 느꼈다. 사후세계에서 이렇게 총기를 띈 눈빛을 보는 것은 확연히 드문 일이었다. 다시 말해줄까? 너, 죽은 거라니까.


"알아요, 나 멀쩡해요. 귀 멀고 죽은 거 아니에요."
"그런데 꽤나 기분 좋은 눈치인데."
"기분 좋은 거 맞아요. 근데 그 쪽은 누구세요?"


저승사자? 검은 양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마츠카와는 확실히 그러한 인상을 남긴다. 저승사자 겸 신. 마츠카와는 여상하게 답을 내놓았다. 그에 답하듯 놀란 기색을 띈 소년에게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신이 이렇게 잘생기고 젊으신 분일 줄은 몰랐는데? 저승에서 늙을 수 있겠냐. 노화를 피해간 마츠카와의 얼굴에는 주름 하나 없다. 깨끗한 용모에서 비현실적인 풍채가 나온다. 진한 쌍꺼풀이 그의 눈두덩이에 내려앉아있다. 더없이 깊은 눈. 소년은 생각했다. 죽음의 신다운 기세를 풍기는 성싶다고. 소년은 그의 존재를 빠르게 이해했다. 수긍이 굉장히 빠른 편이네. 마츠카와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름이 뭐야? 소년은 손을 맞잡고 몸을 일으켜주는 호의를 받았다. 하나마키 타카히로요. 내 이름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신이니까.


"글쎄, 대화는 다가가려면 필수라고 생각하니까."
"신도 별 거 없네요."
"뭐 그럴지도 몰라. 저승은 내 집이나 다름없으니까 여기서나 좀 전능하지. 뭐 인간들에게는, 글쎄."
"전지전능해요? 뭐 보여줘 봐요, 인간하고 똑같이 생겼어도 뭔가 특별한 게 있을 거 아니에요."
"글쎄, 뭘 어떻게 보여줘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하나마키는 눈을 한번 깜박였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신이 잠깐 명멸한 것도 아니었는데, 어느새 그는 어두컴컴한 구덩이 속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무서운 속도로 추락하는 하나마키는 입에서 비명을 터뜨리며 흰 바닥에 사뿐하게 안착했다. 정신 차릴 틈도 없이 위험과 무사를 겪었다. 고성이 멎곤 그는 어느새 멀쩡히 대지에 서 있는 자신을 보고 다시금 경악했다. 그리고 공중에 앉아있는 마츠카와는 어깨를 으쓱했다. 보여 달라며? 마츠카와는 공기를 딛고 착석한 채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지극히 당당했다.


"무, 무슨 짓이에요! 죽는 줄 알았네!"
"너 이미 죽었잖아."
"그렇긴 하지마는... 그래도 무서웠잖아요."
"네가 겁낼 게 뭐가 있어."


이미 죽은 이상, 죽지도 다치지도 않는 네 처지를 즐겨. 마츠카와는 하나마키를 끌어당겨 옆자리 허공에 앉혔다. 아까 입꼬리 슬그머니 올라가 있어서 이미 즐기는 것 같았더니만, 역시 아직은 적응이 덜 됐네. 하나마키는 당연하다며 툴툴거렸다. 다리를 만지작거리는 손을 마츠카와는 잡아채 끌었다. 둘은 공중을 걸었다.


"다리 안 부러져. 걱정 마."
"어디 가요?"
"일단 가자. 가는 길에 너랑 얘기도 좀 하고."
"신이 가라면 가야지 뭐. 제가 궁금해요?"


저승에서 한가하게 시체들 맞는 역할이 말동무할 친구가 어딨어. 그리고 마츠카와야, 내 이름. 마츠카와 잇세이. 그는 호칭을 정정하라는 듯 대뜸 이름을 드밀었다. 신도 나이 있어요? 없어, 그딴 거. 액면가는 거의 또래로 보이는데. 하나마키는 시원하게 말을 놓았다. 맛층, 사실 죽기 전엔 좀 무서웠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천천히 걷고 있던 마츠카와는 잔잔히 미소를 띄웠다. 호기롭던 꽃송이가 무서워하는 게 다 있네. 죽음이 정말 영원한 끝이 아니라서 다행이야. 오히려 여기가 좋은 것 같은데? 온갖 제약 없이 편하게 지내도 되잖아. 하나마키는 맑게 웃었다. 마츠카와는 그를 슬쩍 돌아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죽은 사람들이랑 무채색밖에 없는 저승이 맘에 들어? 온통 하얀 세상인데. 순백으로 칠해진 저승은 검은 경계선만이 그어져 겨우 땅과 하늘을 구분할 수 있었다. 죽음은 어둡지 않았지만, 활기가 존재치 않는다. 하나마키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글쎄, 사실 좀 재미없긴 하더라. 온통 허옇고, 검고."
"거 봐, 나 없이 혼자 있으면 솔직히 미쳐버린다니까."
"여긴 왜 그래? 왜 색깔이 없어? 난 분홍색을 보고 싶어. 여기는 내 모습을 비춰볼 거울이 없잖아."
"거울, 만들어 줘?"
"그런 의미가 아니고, 그냥 좀 화려하게 칠해진 곳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래? 인테리어 다시 생각해 볼게. 무채색이 취향이라고 말하며 입을 느릿하게 찢는 마츠카와는 하나마키에게 다시 물었다. 넌 어떻게 죽었어? 하나마키는 조금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죽음을 맞이하며 버린 육신에 기억까지 일부 두고 온 것처럼 필름은 쉽게 끌려오지 않았다. 하나마키는 흐릿한 장면들을 되짚어 보면서 자신이 죽게 된 이유를 깨달았다. 아, 맞아. 자살이었지, 나. 하나마키는 목숨이 끊기지 전 끔찍하게 느꼈던 고통을 떠올렸다. 잠깐이었지만 차마 다시 겪기 싫은 아픔이었다. 많이 아팠겠다. 마츠카와의 다정한 듯한 목소리에 하나마키는 눈을 내리깔았다. 점점 기억이 선명하게 뇌리에 물든다.


"여러 가지로 스트레스 받았어. 내 목을 조여오던 끈같이 정말 숨통을 옥죄었던 게 너무 많았던 것 같아. 일단 집에 돈이 없었고, 가족들은 싸워댔고, 내 일도 미래도 잘 풀리지 않아서 매일매일 머리를 감싸쥐고 살았었어."
"쌓인 게 많았구나."
"응, 그리고 지구 기준으로 어제, 그나마 위안이 됐던 여자친구가 죽었어. 정말 사랑했는데. 뻔한 교통사고더라. 장례식에서 혼절할 뻔한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나니까, 날 기다리던 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어. 어쩌겠어 뭐. 할 짓이 아니었지만 세상에 미련이 없는데. 그냥 그렇게 된 거야."


그런데 더이상 그 애 얼굴이 기억이 안 나. 직접적으로 죽게 된 건 그 애 탓인데. 분명 예쁘고 착한 애였는데, 정말 기억이 잘려나간 듯이 안 나. 하나마키는 비소를 띄웠다. 씁쓸한 맛이 입술에 감돌았다. 그래도 저승은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네. 자칫하면 엄청 심심해질 수 있는 곳인데, 네가 있어서. 그리고 이제 안 아파도 되잖아. 이곳은 완벽한 도피처였다. 하나마키는 종종 겪던 두통이 사라진 것에 감사했다. 사색하라고 준 두뇌에 고민이 꽉 차면 터질 듯이 아픈 법이었다. 하나마키는 죽음이 자신의 안타까운 모든 것을 앗아간 것에 대해 기뻐했다. 마츠카와는 실없이 웃었다. 이런 데가 뭐가 좋다는 건지.


"죽은 다른 사람들은 어딨어?"
"영혼들은 서로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곳에 있어. 한마디로, 서로를 못 봐."
"...그럼 평생 너만 봐야 돼?"
"응, 싫어?"


아니야, 많이 놀아 줘. 하나마키는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둘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서서히 멈추는 인영 사이 묘한 정적이 흐른다. 농염한 얼굴이 하나마키를 마주한다. 시시할까나? 호선을 그리는 옅은 쌍꺼풀 아래 목광은 마츠카와에게 정면으로 몸을 부닥쳤다. 하나마키는 어느새 자신과 그를 둘러싼 분위기가 무르익는 것을 느꼈다. 온통 채도 없는 무채색들인데, 왜 내 눈에는 아름다운 색조가 어른거릴까? 하나마키의 고개가 천천히 양옆으로 움직이자, 마츠카와는 빙긋 웃었다. 사후세계의 주인은 그렇게도 심오하던가.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눈이었다. 빠져드는 듯한, 그윽한 눈.


"하루에 몇 명이 죽는지는 알아?"
"...많겠지."
"너, 영혼 치고 내 얼굴 진짜 많이 보는 거 알아?"
"..."
"원래 바쁘니까 빨리 빨리 넘겨버리는데, 넌."
"...나는 왜?"


그거야 알고 싶으니까. 마츠카와가 조용히 하나마키의 턱을 움켜잡았다. 손을 돌리면서 자신의 고개도 약간 꺾는 그는 표정에 장난끼를 우려놓았다. 큰 손이 하나마키의 시야의 각도를 비틀었다. 하나마키는 반항하지 않았다. 네 눈에 칠해진 색들, 몽땅 알아내고 싶어. 웃음기 어린 말투를 끝으로 큰 손이 하나마키의 눈을 덮었다. 캄캄해진 공간 밖으로 마츠카와의 의미심장한 말이 이어졌다. 아마도 너는 여기를 처음으로 물들일 장본인이 될 것 같아서. 조용히 손이 떼지자 내뻗어지는 아름다움이 그의 시선에 인사를 고했다. 찬란한, 색채의 축제.


"마음에 들어?"
"...와."
"그런 눈치네."


무채색이 취향이라 기껏 깨끗하게 비워놨건만, 쓸데없이 예뻐서 고생하게 만들잖아. 어지럽게 색깔들이 묻은 마츠카와의 손바닥에 안광이 부딪치고, 그 다음은 그 뒤였다. 찬연한 총천연색이 조화롭게 온 세상에 열거되어 있었다. 인간 세상과 비슷해 보이면서, 무언가 위화감이 낀 그 풍경. 하나마키는 감탄사를 아낌없이 쏟아냈다. 맑은 색의 천공. 하늘도 곱고 땅도 곱고 피어난 꽃이나 떠가는 구름, 흔들리는 풀까지 훌륭했다. 그리고, 유일하게 이질감을 띤 수줍게 붉혀진 땅은 하나마키의 머리칼을 닮은 연분홍이었다. 이렇게까지 희생적인 신 봤어? 애정의 이기를 숨김없이 탄백하는 마츠카와는 여전히 올곧게 서 있었다.

맛층.
하나마키의 목소리가 떨렸다. 마츠카와의 대답은 입술의 정적으로 대신되었다. 긴 숨을 내쉬며 제자리에 주저앉은 하나마키는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어이, 하나. 함부로 얼굴에 손 대지 마. 색 샐라. 귀를 찌르는 가벼운 농담이 그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하나마키가 애써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티고 선 두 다리가 위태로웠다.


나, 마음대로 색 흘리고 다녀도 돼?
여기 얼마나 더 물들이려고.
아직 너는 물들지 않은 것 같아서.
그래?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면 안 되지. 마츠카와는 눈썹을 올렸다 내렸다.
나 이미 점점, 번지고 있어. 마츠카와가 하나마키의 손을 다시 잡았다. 조금만 더 땡땡이 쳐 볼까? 이끌려가는 손길이 온기를 남겼다. 하나마키의 발자국이 진하게 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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