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향 술주정

W.비앙카



*미래날조 주의




보쿠토는 하얀 숨을 들이마시고 뱉었다. 독한 연기가 숨결에 실려 몸속으로 빨려들어가다 허공으로 흩어진다. 하얀 장대를 물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인다. 입술 틈 사이로 느껴지는 매캐한 달콤함은 결코 뿌리칠 수 없는 맛이다. 보쿠토는 담배를 지져 끄며 생각했다. 이 녀석과의 키스는 정말로 끊을 수가 없네. 아카아시가 싫어하지만.


밤 열한 시가 거의 되어 간다. 어둠으로 잠긴 하늘은 도심답지 않게 꽤 많은 별들이 박혀 빛나고 있었다. 확실히 오늘은 날이 맑았다. 바람도 선선한 게, 밖에 나가서 담배 피우는 것도 편하구나. 보쿠토는 폰을 두 번 두드렸다. 자동으로 켜진 화면에는 아카아시가 미소 짓는 사진배경이 띄워졌다. 문자 알림은 여덟 시 이후로 아직 없었다. 회식이라고 했다. 보쿠토는 이해를 잘 하는 남자였다. 늦은 귀가에도 별 불평은 하지 않았다. 뭐 아카아시가 마냥 연약하지도 않고, 걱정은 되지만 어엿한 사회인인데 알아서 처신은 잘 하겠지. 보쿠토는 시계를 볼 생각도 않고 폰을 꺼 주머니에 넣었다. 사실 자신보다 아카아시 쪽이 더 믿음직한 인물이노라고, 그는 자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카아시를 사랑하기 훨씬 전부터, 아카아시가 그저 같은 팀 세터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보쿠토는 나름대로 자신이 자랐다고 여겼다. 활기 넘치고 사리분별을 잘 못하던 천방지축 고등부 주장 때와는 달랐다. 배구 국가대표가 되면서, 보쿠토는 점차 자신을 올바르게 바로잡았다. 아카아시는 제가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던 것도 나이를 먹으니 바로 배우시네요, 라고 했다. 그러자 보쿠토는 시간이 답이었다고 웃는 아카아시의 목에 매달리며 에, 아카아시 그래도 맞먹을 정도로 날 잘 다뤄 왔는걸! 하며 그를 치켜세웠다. 그러나 배움에도 엇나감이 있었는지, 보쿠토는 대학 생활 그즈음에 어쩌다 담배를 배웠다. 그리고 몰래 피워왔던 담배는 흡연 생활 1년 무렵에 동거인에게 들켰다. 애인 아카아시 케이지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그러나 아무 말 하지 못하는 보쿠토 앞에서 아카아시는 별 화를 내지 않았다. 

어른이 되신 보쿠토 상께 뭐라 하기가 어렵네요.

보쿠토는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챌 만큼 자라 있었다.


보쿠토는 담배를 끊기가 그렇게도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작조차 하지 말라던 유년기 선생님들의 말씀이 기억났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래도 아카아시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로 그의 앞에서는 절대 흡연의 티가 나지 않게 했다. 동기들에게 물어물어 고급 향수를 사고, 담배도 몰래 태우다 한계가 있어 그 횟수를 줄였다. 금연 시도는 수없이 했지만 인내심은 타고난 것이 아닌 듯, 모조리 실패했다.


보쿠토는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카아시가 없는 집 안, 그리 온기가 돌지 않는다. 바쁘네, 회사원 아카아시. 아카아시가 보고 싶고 손 잡고 싶었다. 배구를 그만둬도 예쁜 그 손. 얇고 가늘기만 한데 어딘가 힘이 깃든 그 손. 잡을 수 있어서 행복한 그 손.

집을 비운 애인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보쿠토는 담배 반을 아카아시 생각으로 태웠다. 세 개비째, 보쿠토는 이게 오늘의 마지막 담배라고 생각했다. 아카아시가, 건강에 나쁘다고 했으니까.



"...보쿠토 상."

"어, 아카아시?!"



여기서 뭐 하세요. 뚱한 표정의 아카아시가 어느새 열린 베란다 문과 커튼 뒤에 서 있었다. 다, 다녀왔어? 담배 피우는 모습을 들킨 보쿠토는 머쓱한 얼굴로 재빨리 담배를 껐다. 회식한다며? 일찍 왔네. 들어오는 거 못 들어서... 방금 왔습니다만 보쿠토 상이 집 안에 없으시길래 설마 설마 하고 베란다 와 봤습니다. 질타 섞인 목소리는 약간의 취기가 배어 있었다. 보쿠토는 서둘러 옷을 털었다. 담배떨이를 쳐다본 아카아시는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세 개비나, 보쿠토 상."

"미안, 나도 모르게 많이 피워 버렸어. 아카아시 피곤해? 혹시 술 많이 마셨어? 워낙 술 마셔도 멀쩡한데다 술버릇이 없으니까 구별하기가 힘드네. 아, 담배 냄새 나려나... 뭐라도 뿌릴까?"

"됐습니다. 피곤한 거 알면 좀 안아주세요. 술이 코 좀 닥치라고 하지 않을까요..."



확실히, 오늘은 좀 달렸나 보네. 품에 안겨드는 아카아시를 안은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자그마한 변화를 잘 잡아챘다. 담배 냄새에도 연연하지 않는 작은 어리광. 보쿠토는 한껏 웃으며 아카아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귀여워, 아카아시. 압니다... 평소에는 나올까 싶은 대답도 나오고. 



"아카아시는 술 취해도 좋아."

"당연히 좋아해야죠."

"얌전한데다가 애교가 많아지고."

"담배 냄새 나는 애인에게 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어, 진짜? 정말 뭐라도 뿌린다니까."

"괜찮아요. 곧 잘 건데요. 빨리 제 옆자리에나 누워주세요. 보쿠토 상 옆자리에선 잠이 좀 올 것 같으니까."



알았어. 술기운이 눈꺼풀을 덮으려 드는 듯 아카아시의 눈동자에 졸음이 담겨 있다. 안 그래도 진한 쌍꺼풀 때문에 눈이 무거울 텐데, 금방이라도 묵직한 눈두덩이는 뚝 떨어질 것만 같다. 우리 아카아시, 자러 가자. 싱글벙글 웃는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번쩍 들었다. 보, 보쿠토 상! 아카아시가 눈을 번쩍 뜨곤 경악한 표정으로 보쿠토 목에 팔을 감았다. 피곤한 아카아시 침실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보쿠토는 공주님 안기로 아카아시와 베란다를 떴다. 내려달라는 다급한 외침에도 술 마시고 피곤하다며? 라는 장난스러운 대꾸가 돌아온다. 보쿠토 택시는 금방 손님을 침대까지 데려갔다. 진짜, 보쿠토 상은. 아카아시는 부끄러운 기색이었다. 



"옷 갈아입고 씻고 와. 난 밖에서 기다릴게."

"또 담배 피울 건 아니죠?"

"에이, 아니야!"

"알겠어요. 같이 자요, 오늘은."



보쿠토는 미소 지으며 상체를 아카아시에게 가져다 댔다. 아카아시는 머뭇거리다 가까워진 입술에 가볍게 입맞췄다. 아, 예쁘다 아카아시.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입술에 다시 입맞추고서야 등을 돌렸다. 보쿠토는 방을 나가면서 생각했다. 내일부터 스물두번째 금연 시작이노라고.


신이시여, 색을 거둬가오
W.비앙카


죽었구나, 그렇구나. 분홍 머리 소년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가볍게 숨을 토했다. 마츠카와는 약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죽음에 이렇게 초연한 젊은이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소년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꽤나 웃음기를 띈 얼굴에 마츠카와는 납득의 허기를 느꼈다. 사후세계에서 이렇게 총기를 띈 눈빛을 보는 것은 확연히 드문 일이었다. 다시 말해줄까? 너, 죽은 거라니까.


"알아요, 나 멀쩡해요. 귀 멀고 죽은 거 아니에요."
"그런데 꽤나 기분 좋은 눈치인데."
"기분 좋은 거 맞아요. 근데 그 쪽은 누구세요?"


저승사자? 검은 양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마츠카와는 확실히 그러한 인상을 남긴다. 저승사자 겸 신. 마츠카와는 여상하게 답을 내놓았다. 그에 답하듯 놀란 기색을 띈 소년에게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신이 이렇게 잘생기고 젊으신 분일 줄은 몰랐는데? 저승에서 늙을 수 있겠냐. 노화를 피해간 마츠카와의 얼굴에는 주름 하나 없다. 깨끗한 용모에서 비현실적인 풍채가 나온다. 진한 쌍꺼풀이 그의 눈두덩이에 내려앉아있다. 더없이 깊은 눈. 소년은 생각했다. 죽음의 신다운 기세를 풍기는 성싶다고. 소년은 그의 존재를 빠르게 이해했다. 수긍이 굉장히 빠른 편이네. 마츠카와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름이 뭐야? 소년은 손을 맞잡고 몸을 일으켜주는 호의를 받았다. 하나마키 타카히로요. 내 이름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신이니까.


"글쎄, 대화는 다가가려면 필수라고 생각하니까."
"신도 별 거 없네요."
"뭐 그럴지도 몰라. 저승은 내 집이나 다름없으니까 여기서나 좀 전능하지. 뭐 인간들에게는, 글쎄."
"전지전능해요? 뭐 보여줘 봐요, 인간하고 똑같이 생겼어도 뭔가 특별한 게 있을 거 아니에요."
"글쎄, 뭘 어떻게 보여줘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하나마키는 눈을 한번 깜박였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신이 잠깐 명멸한 것도 아니었는데, 어느새 그는 어두컴컴한 구덩이 속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무서운 속도로 추락하는 하나마키는 입에서 비명을 터뜨리며 흰 바닥에 사뿐하게 안착했다. 정신 차릴 틈도 없이 위험과 무사를 겪었다. 고성이 멎곤 그는 어느새 멀쩡히 대지에 서 있는 자신을 보고 다시금 경악했다. 그리고 공중에 앉아있는 마츠카와는 어깨를 으쓱했다. 보여 달라며? 마츠카와는 공기를 딛고 착석한 채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지극히 당당했다.


"무, 무슨 짓이에요! 죽는 줄 알았네!"
"너 이미 죽었잖아."
"그렇긴 하지마는... 그래도 무서웠잖아요."
"네가 겁낼 게 뭐가 있어."


이미 죽은 이상, 죽지도 다치지도 않는 네 처지를 즐겨. 마츠카와는 하나마키를 끌어당겨 옆자리 허공에 앉혔다. 아까 입꼬리 슬그머니 올라가 있어서 이미 즐기는 것 같았더니만, 역시 아직은 적응이 덜 됐네. 하나마키는 당연하다며 툴툴거렸다. 다리를 만지작거리는 손을 마츠카와는 잡아채 끌었다. 둘은 공중을 걸었다.


"다리 안 부러져. 걱정 마."
"어디 가요?"
"일단 가자. 가는 길에 너랑 얘기도 좀 하고."
"신이 가라면 가야지 뭐. 제가 궁금해요?"


저승에서 한가하게 시체들 맞는 역할이 말동무할 친구가 어딨어. 그리고 마츠카와야, 내 이름. 마츠카와 잇세이. 그는 호칭을 정정하라는 듯 대뜸 이름을 드밀었다. 신도 나이 있어요? 없어, 그딴 거. 액면가는 거의 또래로 보이는데. 하나마키는 시원하게 말을 놓았다. 맛층, 사실 죽기 전엔 좀 무서웠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천천히 걷고 있던 마츠카와는 잔잔히 미소를 띄웠다. 호기롭던 꽃송이가 무서워하는 게 다 있네. 죽음이 정말 영원한 끝이 아니라서 다행이야. 오히려 여기가 좋은 것 같은데? 온갖 제약 없이 편하게 지내도 되잖아. 하나마키는 맑게 웃었다. 마츠카와는 그를 슬쩍 돌아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죽은 사람들이랑 무채색밖에 없는 저승이 맘에 들어? 온통 하얀 세상인데. 순백으로 칠해진 저승은 검은 경계선만이 그어져 겨우 땅과 하늘을 구분할 수 있었다. 죽음은 어둡지 않았지만, 활기가 존재치 않는다. 하나마키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글쎄, 사실 좀 재미없긴 하더라. 온통 허옇고, 검고."
"거 봐, 나 없이 혼자 있으면 솔직히 미쳐버린다니까."
"여긴 왜 그래? 왜 색깔이 없어? 난 분홍색을 보고 싶어. 여기는 내 모습을 비춰볼 거울이 없잖아."
"거울, 만들어 줘?"
"그런 의미가 아니고, 그냥 좀 화려하게 칠해진 곳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래? 인테리어 다시 생각해 볼게. 무채색이 취향이라고 말하며 입을 느릿하게 찢는 마츠카와는 하나마키에게 다시 물었다. 넌 어떻게 죽었어? 하나마키는 조금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죽음을 맞이하며 버린 육신에 기억까지 일부 두고 온 것처럼 필름은 쉽게 끌려오지 않았다. 하나마키는 흐릿한 장면들을 되짚어 보면서 자신이 죽게 된 이유를 깨달았다. 아, 맞아. 자살이었지, 나. 하나마키는 목숨이 끊기지 전 끔찍하게 느꼈던 고통을 떠올렸다. 잠깐이었지만 차마 다시 겪기 싫은 아픔이었다. 많이 아팠겠다. 마츠카와의 다정한 듯한 목소리에 하나마키는 눈을 내리깔았다. 점점 기억이 선명하게 뇌리에 물든다.


"여러 가지로 스트레스 받았어. 내 목을 조여오던 끈같이 정말 숨통을 옥죄었던 게 너무 많았던 것 같아. 일단 집에 돈이 없었고, 가족들은 싸워댔고, 내 일도 미래도 잘 풀리지 않아서 매일매일 머리를 감싸쥐고 살았었어."
"쌓인 게 많았구나."
"응, 그리고 지구 기준으로 어제, 그나마 위안이 됐던 여자친구가 죽었어. 정말 사랑했는데. 뻔한 교통사고더라. 장례식에서 혼절할 뻔한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나니까, 날 기다리던 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어. 어쩌겠어 뭐. 할 짓이 아니었지만 세상에 미련이 없는데. 그냥 그렇게 된 거야."


그런데 더이상 그 애 얼굴이 기억이 안 나. 직접적으로 죽게 된 건 그 애 탓인데. 분명 예쁘고 착한 애였는데, 정말 기억이 잘려나간 듯이 안 나. 하나마키는 비소를 띄웠다. 씁쓸한 맛이 입술에 감돌았다. 그래도 저승은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네. 자칫하면 엄청 심심해질 수 있는 곳인데, 네가 있어서. 그리고 이제 안 아파도 되잖아. 이곳은 완벽한 도피처였다. 하나마키는 종종 겪던 두통이 사라진 것에 감사했다. 사색하라고 준 두뇌에 고민이 꽉 차면 터질 듯이 아픈 법이었다. 하나마키는 죽음이 자신의 안타까운 모든 것을 앗아간 것에 대해 기뻐했다. 마츠카와는 실없이 웃었다. 이런 데가 뭐가 좋다는 건지.


"죽은 다른 사람들은 어딨어?"
"영혼들은 서로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곳에 있어. 한마디로, 서로를 못 봐."
"...그럼 평생 너만 봐야 돼?"
"응, 싫어?"


아니야, 많이 놀아 줘. 하나마키는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둘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서서히 멈추는 인영 사이 묘한 정적이 흐른다. 농염한 얼굴이 하나마키를 마주한다. 시시할까나? 호선을 그리는 옅은 쌍꺼풀 아래 목광은 마츠카와에게 정면으로 몸을 부닥쳤다. 하나마키는 어느새 자신과 그를 둘러싼 분위기가 무르익는 것을 느꼈다. 온통 채도 없는 무채색들인데, 왜 내 눈에는 아름다운 색조가 어른거릴까? 하나마키의 고개가 천천히 양옆으로 움직이자, 마츠카와는 빙긋 웃었다. 사후세계의 주인은 그렇게도 심오하던가.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눈이었다. 빠져드는 듯한, 그윽한 눈.


"하루에 몇 명이 죽는지는 알아?"
"...많겠지."
"너, 영혼 치고 내 얼굴 진짜 많이 보는 거 알아?"
"..."
"원래 바쁘니까 빨리 빨리 넘겨버리는데, 넌."
"...나는 왜?"


그거야 알고 싶으니까. 마츠카와가 조용히 하나마키의 턱을 움켜잡았다. 손을 돌리면서 자신의 고개도 약간 꺾는 그는 표정에 장난끼를 우려놓았다. 큰 손이 하나마키의 시야의 각도를 비틀었다. 하나마키는 반항하지 않았다. 네 눈에 칠해진 색들, 몽땅 알아내고 싶어. 웃음기 어린 말투를 끝으로 큰 손이 하나마키의 눈을 덮었다. 캄캄해진 공간 밖으로 마츠카와의 의미심장한 말이 이어졌다. 아마도 너는 여기를 처음으로 물들일 장본인이 될 것 같아서. 조용히 손이 떼지자 내뻗어지는 아름다움이 그의 시선에 인사를 고했다. 찬란한, 색채의 축제.


"마음에 들어?"
"...와."
"그런 눈치네."


무채색이 취향이라 기껏 깨끗하게 비워놨건만, 쓸데없이 예뻐서 고생하게 만들잖아. 어지럽게 색깔들이 묻은 마츠카와의 손바닥에 안광이 부딪치고, 그 다음은 그 뒤였다. 찬연한 총천연색이 조화롭게 온 세상에 열거되어 있었다. 인간 세상과 비슷해 보이면서, 무언가 위화감이 낀 그 풍경. 하나마키는 감탄사를 아낌없이 쏟아냈다. 맑은 색의 천공. 하늘도 곱고 땅도 곱고 피어난 꽃이나 떠가는 구름, 흔들리는 풀까지 훌륭했다. 그리고, 유일하게 이질감을 띤 수줍게 붉혀진 땅은 하나마키의 머리칼을 닮은 연분홍이었다. 이렇게까지 희생적인 신 봤어? 애정의 이기를 숨김없이 탄백하는 마츠카와는 여전히 올곧게 서 있었다.

맛층.
하나마키의 목소리가 떨렸다. 마츠카와의 대답은 입술의 정적으로 대신되었다. 긴 숨을 내쉬며 제자리에 주저앉은 하나마키는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어이, 하나. 함부로 얼굴에 손 대지 마. 색 샐라. 귀를 찌르는 가벼운 농담이 그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하나마키가 애써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티고 선 두 다리가 위태로웠다.


나, 마음대로 색 흘리고 다녀도 돼?
여기 얼마나 더 물들이려고.
아직 너는 물들지 않은 것 같아서.
그래?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면 안 되지. 마츠카와는 눈썹을 올렸다 내렸다.
나 이미 점점, 번지고 있어. 마츠카와가 하나마키의 손을 다시 잡았다. 조금만 더 땡땡이 쳐 볼까? 이끌려가는 손길이 온기를 남겼다. 하나마키의 발자국이 진하게 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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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경
W.비앙카

* 전장AU


선발대에 설 이유가 뭐냐고 츠키시마는 따져 물었다. 본부에서 내린 명령이라도 후발대에 서겠다고 요청만 하면 바로 바꿔줄 텐데 굳이 선발대를 왜 고집하냐며 그는 소리 질렀다. 쿠로오는 자신이 원하는 바라며 표정을 굳혔다. 도대체 내가 왜 후발대에 서야 하는 거지? 쿠로오가 하는 말이 어이 없다는 듯 츠키시마는 사납게 쏘아붙였다. 그 위치에서 부원들 이끄는 게 자기여야 한다는 강박관념 좀 버려요. 진짜 그 자존심 하나 지키겠다고 위험에 스스로를 내던지는 거 진짜, 유치하고 졸렬해. 뭐? 쿠로오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얼굴에 조각된 주름 사이에 분노가 덕지덕지 묻어났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츠키시마는 날카롭게 눈을 부딪혔다.


"지금 내가 자존심 하나 지키겠다고 선발대 서는 걸로 보여?"
"쿠로오 상은 내 생각 하나 안 해요? 위험한 곳에 당신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 알기나 하냐고요!"
"넌 그렇게 내가 쉽게 죽을 걸로 보여? A팀이 왜 A팀이라고 생각하는데? 츠키시마,"
"못 미더워요. 죽거나 다쳐올 것 같단 말이에요. 그 곳, 적군이 얼마나 많은지 알기나 해요? 내가 얼마나 걱정되는지 알기나 하냐고요! 못 믿어요, 쿠로오 상!"
"젠장 진짜! 케이, 내가 모를 것 같아? 난 뭐 자존심 하나 때문에 그 곳 가겠어? 내가 얼마나 많은 목숨들을 책임지고 있는지 알기나 해? 빌어먹을 책임감이 있어서 그래, 그런데도 날 못 믿어? 도대체 나랑 어떻게 같은 길을 걸어온 거야? 못 믿는다고? 못 믿어?"
"호언장담하지 마세요! 그 책임감을 왜 선발대에 서는 걸로 지키는데요? 뒤에서도 충분히 대원들 이끌어줄 수 있잖아요! 당신 최고의 행동요원으로 훈련받았는데, 그 정도도 못 해요?"
"츠키시마, 더이상 나 무시하는 말 꺼내지 마."
"지금 난 쿠로오 상의 한심한 모습밖에 안 보여서요!"


씨발, 진짜! 쿠로오가 이를 갈며 벽을 내리쳤다. 움찔 하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는 대담함에 쿠로오는 더 열이 받은 듯 보였다. 츠키시마는 거칠게 밀렸다. 어깨를 과격하게 밀치는 손에 힘이 잔뜩 실려 반항할 수 없었다. 이거, 놔요...! 벽에 쾅 부딪히는 순간 츠키시마는 비명을 내질렀다. 쿠로오는 그를 계속 밀어붙였다. 계속 그런 말, 아무것도 모르고 지껄이지 마. 내가 7년동안 밟았던 전장을 알아? 총만 들고 4년을 지냈던 네가 뭘 알고 그래. 나를 다 안다는 듯 깎아내리는 거, 진짜 화 나게 해. 쿠로오는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츠키시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쿠로오에게서는 살기가 넘칠 듯 흘렀다. 이를 악문 모습에서 겨우 절제하고 있는 분노가 여실히 보였다. 츠키시마는 쿠로오를 밀었다. 밀리지는 않았지만 쿠로오는 천천히 두 발짝 물러났다. 츠키시마는 빠져나와 뒤돌아보지 않고 막사를 나갔다. 입을 꼭 다문 얼굴이었다. 쿠로오는 가빠오는 숨을 뱉었다. 화가 잔뜩 끓는 숨결이었다. 눈을 감고 그는 의자에 앉았다. 낡은 군복은 말라붙은 갈색 혈흔으로 가득했다. 피곤했다. 츠키시마는 그답지 않게 감정적이었다.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던 모습은 쿠로오의 안위 앞에서 사그라들었다. 둘이 싸운 적은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이처럼 큰소리를 냈던 것도 오랜만이었다. 무거운 마음을 달래듯 쿠로오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천막이 밤바람에 흔들렸다. 안을 밝히던 촛불도 위태롭게 흔들렸다.


"진짜, 편치 않게시리."


쿠로오는 손에 감겼던 붕대를 다시 감았다. 핏물이 채 빠지지 않은 채였다. 케이, 걱정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리 거친 소리는 필요 없었는데. 나긋하게 혼잣말이 부서졌다. 그 바람의 주인공은 이 자리에 없었다. 이성적인 빛이 보이지 않았던 눈은 낯설었다. 쿠로오는 흥분했던 태도를 후회했다. 케이랑 있어야 하는데. 쿠로오는 탄식 섞인 혼잣말을 계속했다. 이틀밖에 안 남았는데. 젠장, 좀 부드럽게 말했어야 했어. 쿠로오는 괜스레 총탄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굳이 개수를 재고, 권총들에 장전을 해놓는다. 같은 시각  츠키시마도 무기를 들고 손질을 하고 있다. 헝겊으로 긴 스나이퍼 총을 닦는 손에 힘이 없다. 윤이 날수록 얼굴에는 핏기가 사라진다. 그렇게 무서운 얼굴. 혼잣말은 츠키시마의 입술에서도 뱉어졌다. 전장에서 맹수 같던 사람이 내게 으르렁댄다니. 조금만 더 그를 생각해서 말할걸. 원하던 바도 이루지 못할 것 같았고, 쿠로오와는 싸우고 말았다. 츠키시마는 총을 내려놓은 무릎 위로 상체를 무너뜨렸다. 얼굴에는 속상한 티를 숨기지 못했다.


"내일 얼굴을 어떻게 보지."


뭐라고 말하지. 속상한 목소리는 밤 사이를 뚫고 까마득한 밤하늘에 스며들었다.



-


다음 날 하루종일 둘은 서로를 볼 수 없었다. 쿠로오는 훈련이 있었으나 츠키시마는 자신의 천막 안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마 잡생각에 파묻혀 있거나 책을 읽겠지. 쿠로오는 자신의 파트너 저격수 야쿠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빨리 가서 화해해. 나 그런 거 서투른데. 인상도 서글서글하게 잘 웃고 다니는 놈이 뭔 소리래. 쿠로오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저녁식사를 배식받을 때까지 츠키시마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마른 놈이 왜 밥도 굶는대? 야쿠는 옆에서 식판을 비우고는 일어섰다. 먼저 간다? 응, 먼저 가라.
쿠로오는 거의 먹지 않은 식사를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일어섰다.


"아주머니, 1인분만 더 부탁드립니다."


쿠로오는 배어나는 손의 땀을 남몰래 스윽 닦았다. 전쟁터보다 더 긴장되기 시작했다.


츠키시마는 점점 내려앉는 어둠에도 신경쓰지 않은 채 초에 불을 붙이려고 하지 않았다. 컴컴한 막사 안이 책의 글자를 흐트려놓는데도, 그는 어둠에서 눈을 뜨고 싶지 않다는 듯 되려 이불 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구겨진 이불보가 심란한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끈으로 고정되어 잘 닫힌 입구는 흔들림 없이 굳건했다. 츠키시마는 자신이 묶어둔 천이지만 자꾸만 불만스러운 시선을 꽂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실내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그는 낡은 베개로 자꾸만 파고들었다. 어린 애 같이. 그는 자신을 타박했다. 담요를 끌어당겨 머리 끝까지 덮었다. 바보 같네. 혼잣말은 답답한 이불 속에서 결국 자신에게 맞았다. 이불 속에 있다보니 갑자기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츠키시마는 담요를 확 열어젖혔다. 분명 묶어놨던 입구의 천은 위로 걷혀 있었다. 어둠을 깨는 약한 빛은 쿠로오 뒤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이의 손에는 식판이 들려 있었다. 츠키시마는 조금 입을 벌렸다. 그는 일어나 앉을 수밖에 없었다. 잔잔한 미소가 쿠로오의 얼굴에 걸려 있었다. 그는 협탁에 식판을 내려놨다. 가깝고도 먼 거리에 정적만이 흘렀다. 츠키시마는 무언가 말하려 입을 뻐끔거리다 결국 닫았다. 첫 마디는 쿠로오의 입술에서 모습을 보였다.


...안녕. 잘 쉬었어?


눈을 휘며 인사하는 쿠로오를 보자 츠키시마는 원인 모르게 눈물이 났다. 젖은 눈이 쿠로오를 응시했다. 촉촉함을 느낀 예민함은 발걸음을 츠키시마 쪽으로 이끌었다. 쿠로오는 침대 위에 걸터앉은 그를 꽉 끌어안았다. 그제서야 츠키시마는 울먹였다. 침착한 목소리가 울음 섞여 뭉개졌다. 미안해. 쿠로오는 등을 토닥이며 사과를 털어놓았다. 내가 할 소리를, 요... 쿠로오는 츠키시마와 어깨를 맞댔다. 꽉 끌어안는 팔에 들어간 힘은 어제와 다르게 부드러웠다.


"밥은 왜 안 먹었어."
"입맛 없었는데... 뭔가 밥이랑 올 것 같았거든요."
"농담은. 너,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뭐가요."
"내 파트너, 너로 해달라고 그랬다며."
"야쿠 상이 말하던가요?"
"이제 날 보내게 됐으니까 같이 덮어쓰겠다 이거네."
"가도 같이 가야죠."
"어쩔 수 없지, 지켜줄게."


겹쳐진 머리통을 떼어내고 쿠로오는 츠키시마의 어깨를 잡았다. 가볍게 입 맞추고는 악의 없는 눈빛을 츠키시마에게 맞췄다. 츠키시마의 속눈썹이 위로 휘었다.


"적을 해치우는 총은 내 역할이야. 대신 넌 내 눈이고, 조준경이 되는 거라고 생각해. 내가 위험을 피할 수 있는 건 너에게 달려있기도 해. 그렇게 불안하면 우리가 같이 잘해 내면 된다고 생각해."
"...훨씬 믿음직하네요."
"믿어, 파트너."


저도, 믿어요. 이제서야 믿지, 진짜. 밉지 않게 입술을 잡아 살짝 비튼 쿠로오는 대뜸 깊게 파고들었다. 혀를 얽고는 열기 오른 숨 사이로 말을 조각내 밀어넣었다.

사랑해.
너 기다리는 밤, 반달
W.비앙카

*뱀파이어AU로 뱀파이어 보쿠토와 인간 애인 아카아시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강할 줄을 알아야지, 비실비실 낮만 되면 허약하게 누워만 있다. 아,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은 아니었지만. 더운 여름에 창문을 다 닫고 커튼을 쳐 놨기 때문에 더운 공기는 집 안에 가두어져서 내 호흡에는 덥혀진 숨만 가득했다. 돌아누워 자고 있는 보쿠토 씨가 미워 똑바로 돌려놓으면 그것조차 눈부신 듯 잠결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또 못나 보여 도로 그를 모로 눕히곤 이불을 똑바로 덮어 주었다. 덥기는 더운지 얼굴에 맺힌 땀방울은 그의 거친 목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나는 수건을 가져다 물을 적셔 땀을 닦아주고 목에 시원하라고 물수건을 올려놓았다. 늦저녁에 잠이 깬 그가 멋쩍은 표정과 함께 고맙다고 말을 건네면 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러니까 기운 좀 차려보라고 따끔하게 쏘아붙였다.


"미안, 여름엔 어쩔 수 없잖아."
"진짜, 보쿠토 씨 뱀파이어 맞아요? 내 환상은 이렇지 않았는데."
"아니, 뭐...자연광이 닿으면 어쩔 도리 없이 기력이 없어져서. 우리 그래도 꽤나 신사적인 종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걸?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는 목덜미에 손도 안 대고."
"피는 얼마든지 드릴 테니까 좀 일어나 주실래요? 저도 더운데 참 낮에 고생하게 만들고."


미안하다며 웃으면서 내게 입을 맞춘다. 미운 입술을 가볍게 흘겼다. 예쁜 애인 고생하게나 만들고, 솔직히 나도 내가 맘에 안 들어. 보쿠토 씨는 어두워진 창밖을 힐끗 보더니 이제 문 열자며 바람 좀 쐬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눈빛이 어딘가 복잡했던 것을 알아채지 못했었다. 그제서야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을 수 있었다. 하루종일 더위에 시달렸던 터에 베란다에서 잠시 약한 바람을 쑀다. 보쿠토 씨는 뒤에서 내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일어났으면 밀린 설거지 좀 대신 해주실래요? 혼자 먹는 밥도 외로웠으니까. 보쿠토 씨는 내 입에서 미운 말들을 해도 알겠다고 웃었다. 달그락 달그락, 그릇 부딪히는 소리를 내는 그의 손끝에 맺힌 내 시선은 미워도 사랑하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보쿠토 씨, 빨래는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아니야, 해 떠 있는 동안 수고시킨 거 미안하잖아."
"그래도..."
"미운털 박힌 뱀파이어 일 좀 시켜 주라."


웃는 얼굴에 차마 당신이 밉지 않다고는 못하고 빨래통을 붙잡은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세탁실로 들어가는 그가 너무나도 평범한 나의 연인 같아 사실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베여 다쳤을 때 상처에 맺힌 피들을 조심스레 핥아올렸던 그와 같은 사람인지. 그 덕분에 손가락의 상처는 빠르게 아물었었다. 그런 순간을 제외하곤 그저  빛에 약한 한 인간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다운 모습을 보여달라고 하지 않았는데. 떠날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나 다음 보름달 뜰 때까지 나가 있어야 할 것 같아. ...혼자 맛있게 식사하고 있는 사람 면전에 할 말입니까? 그는 인간 음식을 먹지 않기에 내가 익숙하게 홀로 밥을 먹고 있을 때 뜬금없이 마주앉더니 이런 말이나 꺼낸다. 집에 아예 못 들어오시는 거예요? 응, 뱀파이어의 개인적인 사정. 그동안 못 보여줬던 흡혈귀스러운 모습 보여주고 와야 한다며 그는 또 실없이 웃었다. 뭐가 좋다고 웃는 건지. 잠시 놓았던 수저를 다시 들었다. 아무렇지 않게 반찬을 입에 넣었다. 굳이 자세히 묻지는 않았다. 보쿠토 씨는 턱을 괴고 나를 쳐다봤다.


"속상하진 않고?"
"제가 왜 그런답니까, 어린 애도 아니고요. 오히려 여름에 고생할 거 덜었으니 엄청 좋네요."
"아, 아카아시 너무하잖아?"
"그럴 만 하잖아요. 뭐, 그래도 잘 다녀오시고요. 위험한 건 아니죠? 막 인간들 다 물어뜯고 다니는 것도 안 돼요."
"뭐? 우리가 어떤 이미지인거야 도대체... 우린 신사들이야 아카아시. 걱정은 말고."


아카아시 두고 가서 마음이 편하지 않다며 미안하다는 말을 연신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가 준비를 좀 해야 하겠다며 방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반찬을 집던 젓가락을 식탁에 탁 내려놨다. 입맛이 그쳤다. 괜찮대도 저 사람은 사과나 하고 있고. 하여간 요새 예쁜 구석이라고는 찾기 힘들다. 낮에 실컷 노동이나 하게 하고, 이제는 또 오랫동안 바깥 구경이나 하시겠단다. 해 떠 있는 동안 누가 챙겨준다고.

차려놓은 내 몫의 저녁식사는 거의 다 냉장고에 넣어지거나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방에 들어가보니 보쿠토 씨가 그동안 입지도 않았던 양복을 다 차려입고 있었다. 넥타이까지 깔끔하게 맨 모습이 참 조각같긴 했다. 맵시는 참 잘 산다. 몸이 곱게 생겨서는, 매일 침대에서 하얀 티나 입고 이불로 꽁꽁 감춘다. 뭔 양장을 입었어요? 아, 이렇게 입고 오라고 잔소리 많이 들었거든. 뭐 정해진 복장이라나. 굳이 이렇게 입지 않아도 충분히 신사답다며 불만을 쏟는 보쿠토 씨의 말은 흘려 들었다. 밑에 놓여진 여행가방을 꼼꼼히 확인하니 이 인간 또 칫솔을 안 챙겼다. 칫솔은 왜 안 챙겼냐며 타박하자 보쿠토 씨는 또 머쓱하게 웃는다. 칠칠맞아서는 어디 내놓기가 불안하다.


"다녀올게, 아카아시! 집 잘 지키고 있어."
"제가 개예요? 연락은 할 수 있어요?"
"미안, 못 하게 할 걸? 그래도 보고 싶을 거야."
"예, 저도요. 다녀오세요."
"보름 후에 봐."


미소 뒤로 문이 닫히고, 집 안은 무언가 싸늘해졌다. 그리 고독하지는 않았다. 물론 외롭겠지만 혼자 편할 것 같았다. 15일 뭐 금방이니까.

아, 금방은... 아니었던가.



-


보쿠토 씨가 없어진 나의 일상에서는 무료함이 반을 채웠다. 보쿠토 씨를 간호하는 데 썼던 낮시간에는 무의식적으로 물수건을 적셨다가 그의 부재를 깨닫고는 다시 걸어두기를 반복했다. 처음이라서 그런지, 아직 잘 적응이 되지 않는다. 보름 후에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가 돌아올 텐데, 괜시리 불안하다. 실수로 태양빛을 쪼여서 쓰러지면 어떡하지. 그의 생각을 떨쳐내려 TV를 켰다. 드라마의 이야기가 뻔하다. 채널을 돌려 예능에 안착해도, 출연진들의 말이 귓속에 박히지 않는다. 보쿠토 씨, 혹시 내 머리를 물고 간 건 아니죠? 당신 생각밖에 나지 않는 머리가 밉다. 의미없이 리모컨을 만지작대다 결국 전원을 끈다. 온갖 잡일을 다 처리해도 결국 생각은 비워지지 않는다.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치지 않아도 되는 낮. 지독하게 어색해서 그를 보고만 싶다.

밤이 조금씩 어두워지면 마음은 더 싱숭생숭하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해도 정신은 또렷했다. 이 시간에 원래 잠자리에 들지 않아서 그렇다. 배도 고프지 않았다. 나는 자꾸만 침대에서 뒤척였다.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어색해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베란다로 나가 선선한 바람을 맞았다. 공허한 아카아시 케이지. 보쿠토 씨가 보고 싶어 정상적으로 생활을 하지 못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지극히도 평범한 삶은 보쿠토 씨를 만나며 비현실적으로 변해버렸다. 입을 맞출 때 혀를 스치던 뾰족한 송곳니. 혈액 팩을 마시고 입술에 묻은 붉음을 축이던 혀ㅡ 그래, 꼴사납긴 하지만 그립다. 침대에 누워 감고 있던 눈도 사실 예뻤고, 당신의 드러난 목은 내가 뱀파이어가 된 것마냥 만지고 싶어졌었다. 물수건을 적셔 가져갈 때도 당신 걱정에 목이 탔다. 당신에게 밉다며 했던 타박들은 진심이 아니었고 내가 들었던 미안하다는 말은 굳이 필요 없었다. 용서는 당신의 웃음만으로 충분했다. 당신이 양복을 입었을 땐 너무 멋있어서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었다. 흰 피부에 가슴이 설렜고 내게 입맞추는 입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당신이 없는 밤, 어둠에게 몸의 반쪽을 내준 달에게 눈이 간다. 쪼개어진 달만큼 사실 내 마음도 아프다. 내게 보쿠토 씨가 없는 것처럼 너도 네 반쪽이 없구나. 어둠이 얼른 빛을 뱉어냈으면 좋겠다. 빛나는 달이 곡선으로 완벽히 메워지면, 내게도 보쿠토 씨가 돌아올 텐데. 그리움은 달을 반쯤 삼켰으니 보름달이 뜨면 그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래야 달도 온전히 빛날 테니.


얼른 보름달이 돌아왔으면 좋겠다. 그리운 연인에게 할 말이 많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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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어디 가세요?
W.비앙카


*임신소재 나옵니다. 주의해주세요.
*전문성 없는 글입니다. 내용이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사이에는 적당한 경계선이 존재했다. 다이치는 성실한 회사원이고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초등학생 선생님인 만큼 무언가 건전한 연애를 이어가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있었다. 서로에게 애정 표현도 꼬박꼬박 해가며 2년째 잘 만나는 중이었지만, 진도는 시원차게 나가지 못했다. 다이치는 나를 티나게 아껴 주었으며 나 또한 다정한 태도가 만족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한 고도에서는 우리가 제대로 달궈질 수 없는 법이었다. 그것이 급상승하여 선을 넘고 열기를 띄게 된 것은 모두 지난 2주 전이 문제였다.

아이들의 수련회를 막 마친 시점에, 선생님들끼리는 회식을 가졌다. 그때 나는 약간 무리하다시피 술을 마셨다. 정신이 몽롱할 즈음 동료 선생님의 도움으로 집에는 겨우 갈 수 있었으나 현관에 들어설 때 마주한 다이치에게 어울리지 않는 애교를 부리며 달라붙었던 것이 희미하게 기억이 난다. 그 술주정에 다이치가 넘어갈 줄은 설마 몰랐다. 그 날 밤의 기억은 깜박거리며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숨 가쁜 시간이었다. 관계는 물론 처음이 아니었다지만 그 날은 유난히 지독하게 진득하긴 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은 그 혼미한 정신 속에서 벌어졌다. 다음 날 선명하게 남은 간밤의 흔적들에 따라올 일은 결국 일어나고야 말았다. 한 줄에서 고작 한 줄 더 그어진 결과는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다이치에게 숨길 이유는 없었다. 무서워하던 나를 달래는 것은 그의 혀끝으로 충분했다. 다이치는 그저 날 안으며 믿음직한 한마디를 남겼다.

다 책임질게.

그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망했네, 이제 내 인생 다이치에게 전부 주는구나. 그의 모습을 믿어 결국 결혼을 결정짓고야 말았다. 우리는 요새 결혼 준비로 바쁘다. 부모님께 결혼 허락을 받으러 갔었을 때 다이치가 몇 대 맞은 거 빼고는 모든 일은 잘 풀렸다. 그러나 둘 다 바쁜 직장이 문제였다.


"막상 맞으니까 좀 마음이 편하던데."
"그걸 지금 할 말이라고 해? 난 너 맞을 때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단 말이야."
"허락을 위해서라면 얼굴 정도야 기꺼이 내주지 뭐."
"이 속 없는 사람... 그래서 우리 결혼식은 언제 해?"
"아, 결혼에 신혼여행에 자꾸 회사가 걸리네."
"요즘 바쁘다며. 아 나도 우리 애들 어떻게 하지. 학교에 얘기하기도 쪽팔리다. 교사가 속도위반 결혼이나 하고."
"남편이 나인데 뭐 어때."


하하 웃는 다이치의 등판을 가볍게 때렸다. 어른스러운 이 사람은 가끔 아이처럼 굴 때가 있다. 나는 달력을 가져와 날짜 얘기를 꺼냈다. 의논이 쉽게 끝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이 날은 어때? 난 뭐 휴가를 쓰던지 해야지."
"음, 대강 연휴 걸쳐서 이 날에 하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런가? 아 생각해보니까 저번 달 카드값 너무 많이 나와서 돈이 많지는 않을 텐데."
"식장 좀 싼 데로 잡아야지 뭐... 어떡해. 더 배 불러오기 전에 빨리 해치워 버려야지."


다이치가 한숨을 푹 쉰다. 아, 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벌어와야지.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진짜 마누라 한번 두기 힘드네. 그러니까 두번 둘 생각은 하지도 말란 뜻이지. 웃으며 일침을 날리자 다이치는 네가 내 첫번째니까 걱정은 하지 말라며 허리에 팔을 둘러왔다. 은근슬쩍 안기는.


"아, 결혼하고 애 키우려면 등골 빠지겠다."
"괜찮아. 조금만 고생하자. 사랑으로 극복, 알잖아?"
"아이고,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잖아."


포털 사이트 검색해 보면 돈 때문에 생활 허덕이는 신혼부부들 엄청 많다고 그랬단 말이야. 투정 부리듯 다이치의 어깨 위에 얼굴을 얹자 나는 네가 내 새끼 낳아주는 것만 해도 행복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 맞다, 내 남편 벤츠남이지. 미워할 수 없게 하는 말만 한다. 돈 버느라 조금 수고할 나보다 애 배고 고생하는 네가 더 불쌍해. 뭐든지 내가 우선이라는 생각에 애정이 듬뿍 실려 있다. 얼굴을 당겨 다이치의 목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결혼, 그리 무작정 힘든 건 아닐지도.



-



학교에 결국 내 일을 말했다. 늙은 교장은 탐탁찮은 눈치었지만 동료 교사들은 입 모아 나를 축하해줬다. 오지랖 넓은 음악 선생이 호들갑을 떨으며 어떻게 그렇게 됐냐고 묻자, 술이 웬수라고 적당히 맞춰 주었다. 사실 원수보다는 은인에 가깝지만 그것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여겼다. 어쨌든 나는 자리를 비워야 할 처지이며, 내 자리를 메울 교사도 거의 구해졌다. 아이들에게 알려줘야 할 것 같아 오늘 출근하는 걸음이 뭔가 무거웠다. 아, 짖궂게 놀리려나. 우리 반 애들 장난끼가 참 많은데.

하품을 쩍 하고 아직 졸린 눈과 함께 교실로 들어섰다.  시끄럽던 교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반장이 일어나 인사를 한다. 경례! 하는 구호에 맞춰 나도 따라 고개를 숙인다. 미소를 머금는 입꼬리가 마음처럼 조금 무겁다.


"얘들아, 어제 숙제는 다 했어요?"
"네!"
"선생님이 우리 3반한테 알려줄 게 있는데."


하나같이 궁금해하는 게 얼굴에 딱 보여 그 순진한 표정들이 너무 웃겨서 터질 뻔 했다. 빤히 나를 응시하는 물음표 띈 동공들에게 답을 던졌다. 선생님이 곧 결혼해서 며칠간 자리를 비울 거예요. 그동안 대신 우리 3반 맡아주실 선생님이 오실 건데 잘 해줄 수 있죠? 놀란 탄성이 여기저기에 터진다. 헐, 선생님 결혼하세요? 응, 게다가 선생님이 아이 때문에 나중에는 꽤 오래 자리를 비울 것 같아요. 헐! 연타로 터진 빅 뉴스들은 꼬맹이들의 입을 떡 벌려놓았다. 선생님 임신까지 하셨냐는 말에 쓸데없는 소리를 괜히 했나 싶기도 했지만 맨 앞자리 은혜가 쌤 아기 보고 싶어요, 예쁠 것 같아요! 하는 말에 괜시리 기뻤다. 귀여워, 애기들. 재잘재잘 떠드는 입이 너무나도 깜찍했다. 학교 빠져서 미리 미안해요. 그래도 선생님 아가가 선생님 기다리니까 좀만 이해해줘요? 네에- 하는 대답이 들리자 나는 함빡 미소를 지었다. 한층 입근육이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그럼 이제 어제 가져오기로 한 가정통신문 다들 가져왔지? 뒤에서부터 걷어오세요! 화제를 슬그머니 돌리자 깜빡한 아이들의 탄식이 들려온다. 요 녀석들, 챙길 거 잘 챙겨야지. 원래는 훈계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지만 오늘따라 자꾸 자비를 베풀고 싶었다. 내일까지 꼭 가져오세요. 알림장에 적어 놓으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자그마한 손들이 바삐 공책을 펼친다.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왠지 감미롭다.


수업이 끝나고 퇴근하기 전 무거운 몸을 이끈다. 교무실 책상에 늘어졌다. 몸은 예전보다 쉽게 지쳤다. 아직 초기지만 몸의 변화는 뚜렷했다. 곧 입덧도 겹칠 테고, 그러면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급하게 진행되는 결혼이라 약간 후회하는 마음도 존재했다. 너무 조급한 감이 든다. 역시 아이를 낳고 그 다음 식을 올릴 걸 그랬나. 다이치의 서글서글한 인상을 떠올렸다. 힘들 때는 그이의 얼굴이 도움이 된다.
책상에 올려둔 폰의 액정이 환해진다. 다이치의 문자였다. 폰을 들어올려 잠금을 풀자, 지극히 다이치스러운 메시지가 보였다.

[잘 끝났어? 오늘 안 바쁘면 퇴근하고 잠깐 볼까?]
[데리러 갈게, 스가.]

비록 힘들긴 해도, 뭐 선을 넘는 건 나쁘지 않았다고 본다. 덕분에 좋은 남편 하나 얻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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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스러운 남자
W.비앙카


오랜만이네.

무료한 주말 오후는 평화로웠다. 거실에서 컴퓨터로 자잘한 업무를 마저 해결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하나마키의 혼잣말에 뒤를 돌아보니 그는 사진을 한 장 들고 주저앉아 있었다. 방금까지 서랍을 닦더니, 어떤 사진이길래 샛길로 들었나. 뭔데, 하면서 다가가 확인해보니 우습게도 꽃 사진이었다. 2년 전이었나, 같이 벚꽃 축제에 가서 찍었던 사진. 연분홍으로 가득 덮인 사진을 보니 괜히 오래된 사진기에 시선이 갔다. 그래도 나 사진 꽤나 잘 찍었는데.


"또 가고 싶다."
"그러게. 벚꽃 진짜 예쁘게 피었던 때네."
"새삼스럽게 자기 진짜 사진 잘 찍네."
"한두 번이야?"


하나마키는 칭찬을 해주면 꼭 우쭐해진다며 웃었다. 확실히 저 사진은 꽤나 잘 찍은 편에 속했다. 가지에 적당히 달린 벚꽃과 뒤에 녹은 하늘의 색감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초점, 구도. 사진을 전문적으로 잘 아는 건 아니어도 이 사진은 참 잘 나왔다. 최근은 좀 더 바빠져서 동거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다지만, 연애 초창기 때부터 우리는 사진을 많이 찍는 편이었다. 서로가 너무나도 소중해서, 흰 종이 위에 우리를 담아두는 의미일까. 맛키보다는 더 카메라를 잘 다뤘던 내가 성공적으로 찍어낸 사진들은 앨범에 담겨 깊숙히 장롱 안에 넣어뒀다만, 왜 저 사진만 빠져있는지 모르는 일이다. 하나가 여러 명이네. 다시 컴퓨터 화면으로 눈을 돌리며 농담을 던졌다.


"그런 장난 이제는 재미 없거든. 왜 요즘은 우리 안 놀러가나?"
"음, 요즈음 바쁘긴 바빴다만."
"자기 오늘 일 다 했잖아."
"그러면 잠깐 나갔다 올까."


진짜? 응, 집 앞에 공원 좀 걷자. 이게 얼마만이야. 연애 10년차, 데이트가 얼마만이라는 얘기를 할 만큼 외출이 적어졌다. 사실 자잘한 업무 중 꽃다발을 알아보고 있었긴 하지만, 오늘 말고는 시간을 내기도 힘들 것 같고. 이왕 나가는 김에 밀린 중요한 일 하나를 끝마치려 한다. 하나마키는 가디건을 챙긴다.  나는 입고 있던 옷 그대로 나가려 했으나 자기, 챙겨입어. 하는 잔소리와 함께 내 몸 위에 온기가 하나 덧대어졌다. 커플 가디건. 괜히 귀엽다.


-


햇살은 따사로웠다. 굳이 겉옷을 챙길 필요가 있었을까 고민했지만 여리한 몸 위에 걸쳐진 가디건이 참 예뻐서 생각을 그만뒀다. 바람이 꽃들을 간질였다. 나는 괜히 카메라 가방을 만지작거렸다. 자기야. 응, 왜? 오늘 사진 몇 개 남겨둘까. 오늘따라 자기가 예뻐서. 그거 뽀뽀해달라는 거 돌려말하는 거 맞지. 내 연인은 직구를 해석하려고 드는 게 문제다. 예쁘다고, 예뻐. 하나마키는 씩 웃더니 빠르게 내 볼에 입술을 갖다대고 뗀다. 익숙하게 시선을 피해 스킨십을 하는 것도 나는 적응이 되지 않는다. 언제나 예쁘기에 가슴이 녹는다. 앞서가는 하나마키를 천천히 따라잡았다.

집 앞 공원에는 작은 호수가 있었다. 투명하게 일렁이는 표면에 우리가 비쳤다. 서 볼래? 오랜만에 모델 타카히로 출동인가. 선선한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칼을 살짝 붙잡은 하나마키에게 초점이 잡혔다. 묵직한 카메라의 무게감이 손에 들어온다. 숨을 멈추고, 하나, 둘ㅡ


"잘 나왔어?"
"못 나올 수가 없는 거 아닌가."
"그럼, 모델이 누군데."


웃음이 터진다. 뻔뻔스럽게 달콤했다. 사진기 안을 들여다보면 시원하게 따스한 애인이 서 있다. 앞서 걸어가는 하나마키를 바라보니 근처에 어느새 꽃이 무성하다. 누가 꽃이고 누가 하나마키야. 꽃스러워라, 진짜.

사진은 메모리 안에 쌓이기 시작했다. 찍어주겠다며 하나마키가 카메라를 들었는데 초점이 엇나간 사진을 찍는 바람에 둘이 한참을 웃기도 했다. 파란 하늘이 슬슬 사그라질 때, 이제 들어갈까? 하는 말이 귀에 꽂히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다. 아, 맞다. 전해줄 게 있는데.


"뭔데?"
"...이거, 받아 줄래?"
"어?"


말은 생각보다 쉽게 띄어졌다. 카메라만 넣어야 하는 가방에서 사진이 한 장 나왔다. 마침 인적도 드물고, 장소도 평범하지만 화려한 게 나쁘지 않다. 사진에 테이프로 붙여진 반지를 보고 하나마키는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이게...?


"그냥, 오늘 전해주고 싶었어."
"..."
"언제 줄까 고민했는데, 뭐 그냥 평범하게 주는 게 제일 나을 것 같아서. 그래야 평범하게 네가 수락해주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반지에 우리 사진..."
"우리 사진이라기보단 꽃과 찍은 내 사진이지. 하여튼 뭔 뜻인지는 알겠어?"
"...모를 사람이 어디 있어, 자기야."
"자기야, 보단 여보로 부르고 싶어서. 아는 사람이 그래?"
"아, 진짜. 잇세이..."


결혼할까. 꽃 같은 사람에게는 부케가 제격인데. 화려하게 살게 해주진 못 해도 이렇게 사소하게 단 맛 느끼게 해 주려고 한다. 하나마키는 고개를 푹 숙인다. 보나마나 머리색처럼 얼굴이 붉게 물들었겠지. 고민할 시간도 아까우니까, 빨리 웨딩사진 찍을 준비 할까? 능글맞은 웃음에, 쑥스러운 미소가 돌아온다. 여전히 그렇다.
예쁘다, 내 꽃.